직업이 직업인지라 이연인 여러 방면에 항상 관심 많고, 호기심 많은 편. 그래서 종종 분위기 좋은 바에 가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상대하는 바텐더와 이야기하면서 정보 수집을 함. 그날따라 바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적하고 조용했음. 항상 그랬듯 바텐더 통해서 자기가 이번에 쓰는 글 때문에 그렇다며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 이야길 듣고 있었음.
근데 이연이 앉은 곳 하나 건너 옆에 웬 여자가 한명 들어와 앉더니, 이연인 이름도 모르겠는 어려운 양주를 시키고는 혼자 마시기 시작함. 그 즉시 작가 특유의 호기심이 또 발동해서 안 보는 척 곁눈질로 여자 스캔하는데 검은 스키니 진에 루즈한 티. 그리고 무릎에 조금 못 오는 검은 부츠를 신고 앉은 자리 옆에 가죽 재킷이 걸려있었음. 자연스레 가죽 재킷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센언니 느낌이 물씬 풍기는 여자였음.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컬이 들어가서 등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살짝 어두운 갈색 머리였고, 얼굴은 눈매가 좀 사나운 것 같은데 화장으로 잘 커버한 듯했고, 입술은 적당히 붉었어. 전체적으로 보면 미인 축에 든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순차적으로 눈길이 이동하다가 소매를 걷은 팔을 봤는데 문신이 빼곡히 팔에 새겨져 있음. 사나운 문양은 아니고 부드러운 인상이 드는 꽃들과 그 꽃의 줄기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타투를 본 후에 다시 얼굴을 보니 왠지 타투이스트 느낌도 나고 그럼.
아무튼 몸에 들어간 화려함과는 대비되는 무채색의 의상들 때문에 인상에 깊게 박힌 거 같아. 은근슬쩍 바텐더 불러서 뭐하는 사람인지 물어봤는데, 평소엔 단골이라 이런저런 얘기들 다 해주던 양반이 절대 관심 보이지 말라며 이연이 말림. 큰일 하는 여자라서 괜히 눈에 뜨여 좋을 거 없다는 거야. 근데 원래 금지된 거일수록 끌리는 법이지.
끈질기게 물어도 대답해주질 않자 이연이가 알았다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남.
설마설마하며 지켜보던 바텐더는 이연이가 여자한테 다가가자 이마 짚으며 한숨 쉼. 아쉽게도 자기가 제지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안녕하세요. 앉아도 될까요?”
질문의 내용은 양해를 구하는 건데 이미 여자의 재킷을 팔에 걸치면서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음. 여잔 무례할 수도 있는 이연이 행동을 그저 힐긋 보고는 다시 정면으로 고갤 돌리고 술 들이킴.
“제가 직업이 작가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일 하시는 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바텐더가 넌지시 이야기해줬다는 건 일단 숨겼지. 그런데 가까이 와보니 여자는 이미 여기 오기 전부터 술을 많이 마신건지 술 냄새가 상당했음. 흐트러진 모습이 전혀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도 크게 취한 것 같진 않았어. 직업이 뭔지는 몰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는 않았지.
“...나한테 관심 있어요?”
상대도 안 해주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는데 한다는 말이 저거야. 물론 이연인 글 작업 관련해서 이 여자한테 관심이 지대했지. 근데 여자가 묻는 관심이 다른 류의 관심이란 건 단번에 알 수 있는 이연이였음. 여기서 대답을 잘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이연이를 덮치는데, 여잔 그냥 이연이의 존재자체가 귀찮아졌는지 방금 꺼낸 자기 얘기를 정정하며, 됐다고. 가보라고 함. 그 말에 괜히 다급해진 이연이 결국 사고 침.
“이, 있어요, 관심!”
너 미쳤구나 라고 소리치는 마음의 외침을 애써 무시하며 여자를 향해 웃어 보임. 그제서야 이연이 쪽으로 몸 돌리고 비스듬히 팔 괴고 바라봄. 근데 여자 눈빛이 장난이 아니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가 담겨있는 눈이었어. 하지만 그 속에서 분명히 느껴진 한 가지는 ‘아, 이 여자 외롭구나..’였음.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분명 홀로 외롭게 살아온듯했음.
“...나한테 가까이 오면 그쪽 다쳐요. 그러니까 그 관심 딱 오늘밤으로 접고 끝내요.”
바 위층은 룸으로 되어 있어서 휴식이나 잠도 잘 수 있게끔 설계돼 있었음. 룸으로 데리고 가는 여자 손엔 힘 하나 실려 있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뿌리치고 갈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했음. 거부할 수 있는 기회인데도 거부하고 싶지 않았나 봐.
그렇게 같이 하룻밤 보내고 잠든 이연이가 새벽녘 잠결에 들리는 소리에 깼는데, 여자가 샤워가운 차림으로 소파에서 울고 있는 거야. 당황한 이연이가 서둘러가서 보니 또 술을 입에 대고 있었어. 병을 보니 절반 이상 마신 거 같아. 목 놓아 울지도 못하고 서럽게 끅끅 거리며 소리죽여 우는데 그 모습이 왜 이렇게 마음 아픈 건지. 자기가 달래줘도 되는 건지 망설이다가 그래도 마음이 하라는 대로 가서 안아줌. 등 쓸어주는데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면서도 절대 소리는 내지 않는 여자가 안쓰러울 뿐이었음. 뭐 그리 슬프고 아픈 일이 있었는지 쉽게 그치지 못하던 여자가 진 빠질 정도로 울고 난 후에 정신이 들었는지 이연이 살짝 밀어내고 고개를 듦.
“..미안.. 미안해요...”
“괜찮아요. 사람이 우는 게 어때서 그래요.”
먹먹하게 잠긴 목소리로 미안하다는데 이연이한텐 미안할 일도 아니었어. 술.. 더 마실 거예요? 남아있는 양주를 보니 술이 정말 센 듯해. 자신도 한 가닥 하는데 여잔 더 한 거 같아. 그래도 몸 생각하면 그만 마셨으면 해서 걱정스레 물었는데 다행히 이제 안 마셔도 될 거 같다며 고개를 저어. 여자 안아줬던 팔 완전히 풀고 나란히 옆에 앉아있는데 여자 쪽에서 먼저 이연이한테 말을 건넴.
“우리 어차피 오늘밤까지인 인연인 거죠? 그럼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을 하던 오늘이 지나면 다 잊어요..”
이연인 아무 말 없이 그저 듣고만 있었어. 어렵게 입을 연 여자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무척 궁금했거든. 비록 오늘이 지난 후 잊고 말고는 여자의 의사완 상관없이 이연이 몫이지만.
여자의 이름은 홍난이었어. 한 홍난. 이름마저 여자의 이미지에 적격인 것 같았지.
홍난인 어둠의 세계에 몸담고 있었고, 회장이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린 나이에 조직을 이어받아 보스로 있었음. 하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고, 싸움 잘날 없으며,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자리야. 결코 원해서 앉은 자리가 아닌데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이젠 버릴 수도 없게 되어버린 거지. 고작해야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홍난이가 이 얘길 하는데 왜 이리 참담하고 처연하게 들리는지... 이 사람 환경이 어찌됐든, 놓인 상황이 어떻던, 그런 거 상관없이 그냥 품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어. 그렇게 아침이 밝고 홍난이와 이연이는 깔끔하게 제 갈 길을 갔지.
근데 그건 홍난이 입장에서 서술한 거고 이연이는 전혀 깔끔히 정리하지를 않음. 그 뒤로 매일 같이 그 바에 찾아가 죽치고 있으면서(노트북으로 글 작업도 종종하면서) 홍난이 오길 기다리고 어쩌다 바에 오면 옆자리에 콕 붙어서 조잘조잘 이야기하고, 홍난이가 밀어내도 들러붙고 구질구질하게 굴었음. 근데 또 그게 질척거린다는 느낌은 아니고 홍난이 말상대도 해주고 자기가 작품 쓰면서 겪어온 다양한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해주면서 라이트하게 들러붙는 거지. 그런 게 조금씩 반복되다보니 홍난이가 바를 찾는 회수가 자기도 깨닫지 못했는데 한 달에서 이 주, 이 주에서 일주일, 일주일에서 며칠로 점점 짧아지는 거지. 물론 그래도 이연이가 일정 선 이상은 다가오지 못하게 막는 걸 잊진 않았고.
그러던 어느 날은 이연이가 바에 왔는데 어쩐 일로 홍난이가 먼저 와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음. 룸에 있다는 말에 이연이가 따라 들어갔는데 홍난인 이미 술이 진탕 들어간 상태였고 가까이 가서 보니까 얼굴에 상처도 잔뜩 나있었어.
전에 말한 것처럼 세력다툼과 생사가 오가는 싸움을 한다는 데 정말이었던 거임. 이연이가 술 따라 마시려는 홍난이 잔 내린 다음 얼굴 살펴보는데 홍난이가 갑자기 컵을 집어던짐. 벽 맞고 크리스털 잔이 산산이 부서지는데 그런 것보다 홍난이 다친 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
“..많이 아팠겠다. 치료도 안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가서 약 사올게요.”
“나가... 더 이상 들어오지 마.”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쪽이랑 난, 사는 세계가 달라. 그러니까 더 이상 나랑 엮일 생각 말고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오늘 무슨 일 있었던 거죠? 갑자기 왜 그래요.”
홍난이는 오늘 세력다툼 때문에 피터지게 싸우다보니 문득 이연이랑 자신은 정말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거야. 자신의 존재가 이연이 신변마저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단 걸 깨닫고 제대로 끊어내야겠다 다짐을 했지.
“나랑 엮이면 송이연 당신 인생 더럽게 꼬인다고. 그러니까 그만 하라고...”
“내 걱정 말고, 홍난 씨 마음은 어떤데요? 홍난 씨도 나한테 끌리잖아요. 난 상관없어요.”
“젠장! 왜 말귀를 못 알아들어!? 어미 죽이면서 나와선, 아비 죽이고 이 자리에 올랐어. 당신이랑 처음 잔 날. 그날이 무슨 날인지 알아? 3년간 만났던 아무 잘못 없던 사람이, 조직 보스 애인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죽었어.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날 송이연 당신이랑 그짓을 했다고!! 내 옆에 있으면 너도 죽는다고..!!”
끝에 가선 물기 어리게 바뀐 목소리가, 잔뜩 감정이 고조되어 격양된 홍난이한테서 흘러나왔지. 홍난이도 본인의 이런 참담한 운명이 너무 싫은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어서 괴로울 뿐이야.
주변 사람들 잡아먹는 운명.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런 참담한 운명을 준걸까.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다. 하지만.. 그건 홍난 씨 잘못이 아니에요. 자책하지 말아요.”
제발 밀어내면 멀어지란 말야. 왜 더 가까이 오는 거야..
“난 이기적이라 나밖에 몰라요. 내가 홍난 씨 곁에 남고 싶어서 남는 거니까 죄책감이나 미안한 마음 가질 필요 전혀 없는 거예요.”
네 잘못이 아니라는 그 말이 홍난이가 이십 몇 년간 듣고 싶었던 한마디였는지도 모르겠어. 언제 받아봤는지 모를 걱정과 위로에 가슴이 벅찬 홍난이는 그동안 참아온 모든 걸 쏟아내듯 이연이한테 안겨서 울다 지쳐 잠이 들어. 그리고 이연인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홍난이 곁에 있기로 마음을 다잡음. 그래야만 했거든.
나날이 갈수록 조금씩 가까워져가는 둘은 한 동안 별일 없이 잘 지냈는데,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어. 유독 홍난이 조직과 적대관계이고 규모도 비슷한 선진파가 있는데, 이연이가 홍난이의 애인인 걸 알고 납치해간 거임.
선진 쪽에선 이연이 담보로 협박해오고 눈 뒤집힌 홍난이는 무작정 쳐들어가려고 하는데 밑에 동생들이 뜯어말리지. 여자 때문에 조직을 버리실 거냐고. 지금 상태로 가면 조직 그대로 다른 무리에 먹힌다고.
홍난이는 뭐가 옳은 선택인지를 모르겠어.
이연이 위험하다는 사실에, 또 다시 같은 방식으로 가슴에 품은 사람 잃게 될까봐 심장이 찢어질 거 같은데 동생들이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단 걸 머리로는 알고 있어.
수없이 갈등하다가 오른팔인 승재에게 모든 걸 일임하고, 자긴 죽은 거라 여기고 조직 이끌어가라는 폭탄 던진 후에 이연이 구하러 홀로 쳐들어감.
선진파 소굴에 도착했는데 입구에서부터 삼엄하게 지키며 기다리고 있었음.
치열하게 주먹 휘두르지만 혼자서, 그것도 여자 몸으로 이들을 이길 순 없었지. 개처럼 맞고는 선진 두목 앞에 피투성이로 끌려오게 돼.
“어어. 한홍난. 미친 조랑말이란 타이틀이 무색하게 너무 금방 잡힌 거 아닌가?”
“...차재국. 이연이 놔줘라.. 부탁이다.”
“이런, 이런. 단홍파 우두머리 한홍난이 나 차재국한테 머리 숙였단 걸 알면, 먼저 가신 고인이 역정을 내시겠어.”
홍난이 지키다가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들먹여가며 홍난이 도발하는데 꿋꿋이 참아내는 홍난이야. 차재국이 이연이를 인질로 잡고 있어서 해코지할까봐 제대로 싸우지도 못 했어 사실.
“송이연은 놔주고 우리 둘이 얘기하자.”
“허허. 난 그러기 싫은데?”
데려와!
차재국 명령에 똘마니들한테 끌려 나온 이연이가 홍난이 맞은 거 보고 소리 지르는데, 홍난이는 핏물이 눈에 들어가서 뿌연 핏빛으로만 보여서 목소리로만 이연이 무사하다는 거 확인해.
차재국이 자기를 살려둘 리는 결코 없었으니 어떻게든 이연이만은 지켜야 하는데 각목에 맞아서 띵한 머리가 이연이 지킬 방법을 도무지 생각해내질 못할 거야.
“반년 전에도 그러고 이번에도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시겠다?”
“뭐? ..너 뭐라고 하는 거야. 설마 아진이 그렇게 만든 게 차재국 너였냐?”
“하하하. 아- 나 이거 참. 아니 한홍난 잡기 왜 이렇게 쉬워? 애인만 엮이면 그냥 다 걸리네. 뭐 그땐 널 못 끝냈다만, 지금은 이렇게 붙잡았으니 된 건가.”
“너 이 새끼...!”
홍난이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을 잃게 된 일에 차재국이 개입되어 있는지 까진 밝혀내지 못했었지. 알았다면 아마 진즉에 어떻게 서든 그를 파멸로 이끌었을 거야. 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사지가 벌벌 떨리는 홍난이였어.
“왜 나한테 주먹질이라도 하시게? 그럼 송이연은 죽을 텐데.”
홍난이 앞에서 잔뜩 거드름 피우는 꼴을 이를 악물고 노려보다가 이내 주먹에서 힘 빼고 차재국 앞에 무릎 꿇을 거야.
“..아니. 난 어떻게 해도 좋아. 그런데 제발 송이연 저 여잔 살려줘. 날 찢어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고 싶으면 그래도 좋으니까 제발... 놔줘라.”
“하, 이거 재밌네.”
“호, 홍난 씨. 그러지 말아요! 난 괜찮으니까...”
홍난이 이정도로 무너진 모습을 처음 보는 차재국은 즐거움이 주체가 안 돼서 연신 웃고 있었음. 하물며 반년 전 최아진이란 여자 가지고 장난질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야, 야. 송이연. 이제 됐어. 연기 그만 해도 돼. 너 너무 이입했다?”
“하.. 그럴까요.”
눈물로 엉망이던 얼굴 정리하며 표정을 싹 바꾼 이연이는 그동안과 많이 달랐지. 사실 이연이는 차재국 조직원이었어. 5년 전 홍난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어떻게든 홍난일 지키기 위해 위협이 될 수 있는 다른 세력들을 엉망으로 만들고 가셨거든. 그 일에 이연이의 약혼자도 껴 있었고 약혼자가 죽게 됨. 그 사실을 안 이연이는 5년간 철저히 복수를 준비해.
우선 단홍파와 앙숙인 차재국 밑에 들어가서 정황을 이야기하니 차재국도 자기한테 손해 볼 장사는 아니지. 자기 손 안 더럽히고 눈엣가시이던 단홍파 부술 수 있는 방법인데.
이연인 소설가라는 가짜 직업을 만들어서 평소 홍난이가 가끔 온다는 바를 알아내서 우연을 가장한 기회를 만들어 어떻게든 가까워지지.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홍난이 쪽 정보를 차재국에게 넘기면서 스파이활동을 해. 그 종지부가 오늘이 된 거야. 차재국은 손 안대고 코푼 것도 모자라 모든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니까 즐겁기만 했지. 잘하면 보스인 한홍난까지 협박 도구로 사용해 단홍파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진실을 알게 해서 더 큰 고통을 주려고 이연이와 홍난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겠지.
“5년 6개월간 이 순간만을 기다렸어.”
“......”
홍난인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맞아서 생긴 찰과상들보다 어째선지 심장이 더 아렸거든.
“이렇게 하면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썩 그렇지도 않네.”
피칠갑한 홍난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연이야. 복수의 칼날을 다잡았던 지난날이 무색하게 어째선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지. 그게 단순히 배신을 했다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인지 좀 헷갈려.
뒤통수 맞은 소감은 없니? 이제 마지막인데 무슨 말이라도 해봐.
“내가 밉지? 여태 몸도 섞고 마음도 나눴다 믿은 상대한테 배신당했으니 당연 원망스럽겠지.”
“..원망... 안 해.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뭐?”
“나 여기.. 모르고 온 거 아니야. 널 만난 초기에 시키지도 않았는데 승재가 너 뒷조사를 해서 왔더라. 차재국한테 납치당했다는 소리 듣는데 드디어 올게 왔구나 싶더라.”
“다... 알고 있었다고? 그럼 왜.. 알고 있었으면서 왜 왔는데?!”
“..바꾸고 싶었어. 주위 사람 잡아먹는 끔찍한 내 운명. 내 안에 담았던 사람들 죽어가는 거 더 이상은 안 보고 싶었어..! 너만은 살리고 싶었는데, 그런데 왜 하필 차재국이었냐.. 저 자식은 내가 오든 안 오든 송이연 너 가만두지 않을 놈인데, 왜...”
이연이를 이용해 자신을 잡았으니 더 이상 쓸모없어진 이연이를 죽일지도 모르고, 설령 목숨이 붙어있다 해도 차재국이 절대 곱게 놔줄 위인은 아니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홍난이에게서 쏟아지니 이연이는 둔기에 맞은 것마냥 한동안 머릿속이 멍했을 거야. 한참 둘 사이에 아무 말도 오가지 않다가 허탈하게 웃은 이연이가 입을 열겠지.
“넌.. 내가 속이고 있단 거 알면서도 사랑.., 그게 되디?”
이제 이연인 망연자실해서 홍난이 바라보는데 홍난이는 씁쓸하게 웃기만 함.
“어.. 되더라.”
“미련하긴..!”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는 이연이는 조금 멀리서 지켜보는 차재국 패거리를 바라봤다가 다시 홍난이에게 시선을 돌려.
“송이연. 넌 그냥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태연하게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혼자 뭘 어떻게 해보려고. 게다가 너 이미 한계 아니야?”
실은 말을 안 했을 뿐 자꾸만 눈이 감기려하고 몸이 무거웠지. 이마는 찢어졌는지 계속 핏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래도 한 조직의 보스라는 이름이 뭔지 약한 모습 보이기 싫었을 거야.
송이연.
“부디 너는 살아라. 내가 사랑한 사람들 중 한사람은 지키고 갈 수 있게 해줘.”
“..한홍난...”
“하.. 근데 정말 디지게 아프네. 송이연. 이리 가까이 와봐.”
“..왜... 왜 오래..”
우는 거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가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홍난이가 이연이쪽 보면서 웃는 거야. 피가 눈에 들어가서 그런 건지 애가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고 맞아서 부은 탓에 웃음이 어색했지. 그거에 더 마음이 아팠어.
“이제 마지막인데 얼굴 좀 보여주지.. 눈앞이 흐려서 그래.”
이연인 결국 홍난이 앞에 가선 몸 숙이고 눈 마주칠 거야. 홍난인 더 활짝 웃으려고 노력하고, 그럼 이연이도 애써 웃어 보이겠지.
“거봐.. 웃으니까 보기 좋잖아. 예쁘다 송이연.”
그 말을 끝으로 비척비척 일어난 홍난이 품안에 있던 칼 쥐고 미친 듯이 달려가서 차재국 목 붙드는 데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술렁이는 똘마니들한테 길 트라며 소리치곤 주춤주춤 갈라지는 인파에 이연이한테 가라고 사인 보내고. 이연인 가는 내내 자꾸만 홍난이 돌아보고 우는데, 마지막으로 홍난이가 입을 열겠지. 우리가 처음 만난 곳. 우선 거기로 가.
그게 끝이었어. 이연이 눈앞에서 육중한 문이 닫혀버렸거든.
“하. 끝까지 너답군, 한홍난. 그래 이제 뭘 어쩔 거지?”
“..차재국. 너는 내가 죽여야겠다. 니가 사라지지 않으면 언제라도 이연이가 위험해지겠지. 넌 오늘 나랑 같이 가자.”
“뭐? 자.. 잠깐! 그게 뭔 개소리야! 야! 한홍난-!!”
당연히 홍난이가 무언가를 요구하리라 생각했던 차재국은 당황하고, 그대로 차재국 목에 칼 꽂아 넣고 그어버린 홍난인 무너지는 차재국과, 자신들을 향해 몰려드는 검은 무리를 눈에 담아보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어. 시야가 계속 흐렸는데 감으니까 굉장히 편했어.
항상 자신 때문에 누군가 다치고 죽는 걸 봐왔으니, 처음으로 지켰다는 생각에 마음은 그보다 더 편안했지.
이연이가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바로 가면 오래 알아온 바텐더가 홍난이가 부탁한대로 준비해줄 거야. 송이연이라는 이름은 버리고 조직에 몸담았던 흔적들 전부 지우고, 이연이 앞으로 준비한 몇 십억 대의 돈과 새 신분으로 새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이연이의 복수도 자신이 죽는 것으로 끝났을 테니 더는 위험해지는 일 없이 평온한 삶을 살겠지. 정말 완벽한 결말이었지. 감은 홍난이 눈에서 눈물이 피와 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후로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어.
끝인 줄 알았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5년 전 차재국을 찌른 후 자신도 죽겠구나 체념하고 있을 때, 승재가 동생들 다 끌고 홍난이 구하러 옴. 조직의 본거지를 비우면 적들한테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커서 홍난이도 자신만 홀로 왔던 거였는데, 남아서 수습해야할 다른 일들 다 제치고 왔으니 승재 녀석이 사고를 친 거지.
허우대 커다란 놈이 한놈 한놈 무찌르며 상처투성이인 홍난이 감싸 안고 병원으로 직행해서 간신히 목숨은 건진 홍난이야. 하지만 시력을 잃었음.
“아주머니. 오늘 새로운 봉사자 온다고 하셨죠?”
“네, 아가씨. 조금 있으면 오시겠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꾸벅인 홍난인 다시 정면으로 고개 돌리고 손 안에 책을 만지작거림. 그 사건 이후 홍난이 조직에 커다란 조정이 들어갔음. 단홍파라는 이름을 아예 버리고 새로운 조직이 승재의 지휘 하에 만들어졌지. 홍난이와 연관된 어떠한 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지우고 바꿨어. 홍난이를 위해 승재가 어려운 선택을 해준 거라, 항상 녀석한텐 감사했음.
홍난이는 조직에서 나와 한적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혼자 지내고 있음. 도우미 아주머니는 하루에 한번 씩 청소와 반찬을 만들어주러 왔다가 일을 마치면 돌아가는 거였지. 여태 살아온 인생이 워낙 요란했기 때문에 사실 아직도 한적하고 평화로운 게 적응이 되지 않은 홍난이야.
지난 일을 생각하니 괜시리 흉터들이랑 뼈마디가 아픈 거 같아 생각을 관두었지.
그리고 오늘은 계속 오던 봉사자가 사정으로 더는 못 오게 돼서 새로운 분이 오시는 날이었어. 무슨 봉사냐 하면 앞이 보이지 않는 홍난이한테 책을 읽어주는 거였지. 점자책들이 책장가득 있긴 했지만 공부는 젬병인 홍난이가 점자 공부를 하다말아서 제대로 읽을 순 없었엌ㅋㅋㅋㅋ 그래서 어느 정도 사비를 들여 기관에 연락해 책을 읽어줄 사람을 부른 거야.
손끝으로 각진 책의 촉감을 느끼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려서 마중을 나가. 5년이 됐는데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익숙해지지가 않아. 가구 더듬으며 현관까지 가서 문을 열은 홍난이는 한발 뒤로 빠지며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했음.
“오시느라 힘드셨죠? 여기가 워낙 외진 곳이라..”
“네, 뭐..”
봉사자가 반응이 심드렁해서 좀 위축된 홍난이는 슬리퍼 꺼내주며 들어오시라 하고 거실에 크게 둔 침대로 향함. 큰 통유리로 된 창으로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있단 게 느껴졌지.
침대 옆 보조의자 꺼내서 봉사자한테 내주고 홍난인 침대에 걸터앉아서 설명을 시작했음.
책을 읽을 때의 억양, 속도, 끊어야할 부분. 그런 상세한 부분을 한창 설명하는데 갑자기 손을 덥석 잡는 봉사자 때문에 홍난인 거부감에 손을 팍 빼버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접촉은 실례란 것 모르는 걸까? 아니 근데 보통 이런 봉사를 아무나 할 리는 없고 당연히 주의사항에 대해서도 교육 받았을 텐데 이상했지. 처음에 목소리 심드렁한 것부터 해서 초짜인가 보구나 맘속으로 혀를 찬 홍난이야.
“아.. 저 죄송해요. 제가 스킨십에 예민해서. 다음부턴 먼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름 돌려 말한다고 하긴 했는데 대답이 없어서 저가 한 말에 기분이 나빴나 하고 생각하게 됨. 크흠. 헛기침을 한번 한 홍난이가 잠시 쉬어가야 겠단 생각에 화제를 돌림.
“제가 뭐라 불러드리면 될까요? 기관에서 전달 받은 내용이 전혀 없어서요.”
“......”
근데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음. 그러면서 다시 손에 온기가 와서 닿았지. 이번엔 아까와 달리 천천히 조심스럽게 잡긴 했는데 홍난인 이미 기분이 나빴음. 자기 말을 뭐로 들은 거야.
봉사자가 돌아가면 바로 기관에 연락해서 뭐 이런 사람을 보냈냐고 하려 해.
그런데 이 봉사자의 다른 손이 얼굴로 올라왔어. 홍난인 속으로 쌍욕을 하지만 일단 참았지. 맘에 안 든다고 저 사람한테 주먹을 휘두를 거여, 머리끄덩이를 잡을 거여. 볼 수도 없는데.
“저, 저기요..”
볼을 감싼 손바닥이 느리게 올라와 머리카락을 넘겨주곤 입술을 살짝 건드리는데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 손을 잡아 내렸어. 다투는 한이 있더라도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는데 저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음.
“송이연... 이 입으로 송이연이라고 불러주면 돼.”
“뭐..?”
그제야 제대로 듣는 상대방 목소리였는데, 너무나 익숙한 음성이라 홍난인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손을 뻗음. 약간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 홍난이가 아는 사람 중 딱 한명밖에 없잖아. 손에 부딪친 어깨 그대로 끌어당겨서 꽉 안아보는데 느껴본 적 있는 체온이고, 몸이 기억하고 있는 사이즈야. 진짜 송이연이야.
“스킨십에 예민한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내가 만지면 잘 느꼈었잖아.”
보고 싶었어, 한홍난.
“지, 진짜 송이연 맞아?”
“얘가 눈 안보이더니 의심만 늘었나.”
몸으로 확인시켜주면 믿을 거냐고 농담을 하는데 너무 기쁘면서 이연이한테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
“나 여깄는지 어떻게 알았어?”
“최승재씨. 너 궁상떨며 살고 있나 가서 보고 와보라더라. 그 사람 이제 나 용서했나봐. 자기 보스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얼마나 미웠을까.”
“그랬구나.. 승재 그 자식.”
“근데 넌 왜 나 안 찾았어? 또 그놈의 운명타령 할 거면 그냥 꺼져버려.”
......
“...너.. 여태 내 앞에서 그 성격 어떻게 감췄었냐.”
“흥. 그땐 복수에 눈멀었었는데 뭔들 못해. 그나저나 우리 5년만인데 계속 얘기만 할 거야? 재회의 입맞춤이라도 찐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말에 환히 웃는 홍난이었는데 그전에 비해 많이 밝아진 홍난이가 반가우면서도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새로운 면을 알게 된 이연이었음.
“너가 해줘. 나 안 보여.”
입술 쭉 내미는데 너무 귀여웠어. 가볍게 뽀뽀 해준 뒤 떨어지니 목에 홍난이 팔이 와서 감겼어. 그리곤 침대 쪽으로 확 끄는데 여전히 힘은 좋았음. 얘가 정말 안 보이는 게 맞나 싶을 만큼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이연인 피식 웃었지. 그리곤 자기 아래에 이연이 두고선 손으로 턱 감싸더니 그대로 짙게 입을 맞춤. 그전보다 손의 움직임이 서툴긴 했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어. 앞으론 이연이가 홍난이의 눈이 되어주면 되니까.
두 사람 다 헐떡거리며 떨어지는데 홍난이가 다시 한 번 팔에 힘주어 이연일 끌어안음.
그리웠어, 송이연.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겁나서 차마 못 찾아갔는데 이렇게 먼저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
이연이 품에 파고들며 또록 눈물 흘리는 홍난이. 이제 둘이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면 되겠네.
-
cafe.daum.net/dorawayoajosi
여러분 돌저씨 dvd 사새오.
홍난이연 마포대교/선착장/꽁트/키스신 메이킹 안보고시퍼요??ㅠㅠㅠㅠㅠ
홍연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